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괴베클리 테페 (문단 편집) == 해석 == 이처럼 괴베클리 테페는 학계에 큰 혼란을 야기하면서도 동시에 향후 인류 발전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유적으로 주목받는다. 다만 문제는 유적의 극히 일부만이 출토된 상황이기 때문에 제대로 된 연구가 나오려면 발굴기술의 발전 등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다. 아직 겨우 10% 남짓 발굴되었는데, 이희수 교수의 글에 의하면 적어도 60~70년은 걸릴 것이라고. 현재까지 발굴 성과에서 유추된 가설들은 대부분 발굴을 진행한 독일고고학연구소 클라우스 슈미트 교수가 제기하였다. 교수는 돌기둥의 동물 형상들이 수렵의 사냥감이 아니라 신격화된 사자나 거미, 뱀, 전갈 형상이라는 점에 근거하여, 이곳을 사냥 성공을 기원하기 위해 지은 시설이 아니라 죽은 자들을 보호하는 신들을 모시는 장소로 보았다. 또한 새들, 특히 독수리 형상이 많이 보이는데 이는 [[차탈회위크]](Çatal höyük)와 [[예리코]]에서 많이 보이는 독수리 이미지와 비슷하여 괴베클리 테페를 비롯한 고대 [[아나톨리아]]와 중동권에서도 [[조장(장례)|조장]] 풍습이 존재했으리라 추측된다. [[새]]가 인간과 하늘을 연결하는 매개체라고 보는 풍습은 한국의 [[솟대]]에서도 볼 수 있다. 아마도 고대의 [[조장(장례)|조장]] 풍습을 행했던 사람들은 인간이 죽으면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가 시신을 먹어 그 영혼을 하늘로 인도한다고 생각한 듯하다. 실제로 유적지에서는 인골들이 출토되어 이곳이 당시 사람들의 사후 세계관과 연관된 장소라고 추측할 수 있다. 돌기둥들의 T자 형태를 두고 교수는 앞의 가설과 더불어 동물신들이 보호하는 죽은 자들, 즉 당시 사람들의 조상들을 형상화하지 않았나 생각했다. 교수는 이러한 괴베클리 테페의 언덕 위 신들의 이미지가 고대 기억으로 남아 수메르인들에게 이어져 [[메소포타미아 신화]] 속 에쿠르 신전 이야기로 전해내려왔다는 가설도 제기했다. [[파일:external/taboodada.files.wordpress.com/gc3b6bekli-tepe-5.jpg|width=500]] 괴베클리 테페를 해석하는 데 가장 관건이 되는 것은, '''농경사회가 등장하기 전인 토기없는 신석기 시대에 어떻게 조직 노동력과 문화가 등장했느냐'''는 점이다. 아직까지 괴베클리 테페에서는 농경지나 거주지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인근에 위치한 후대 유적인 네발르 초리(Nevalı Çori)에서 괴베클리 테페와 비슷한 양식의 돌기둥과 조각들이 발견되고 또한 괴베클리 테페와는 달리 집터들과 원시적인 [[밀]]농사 흔적이 밝혀졌다. 네발르 초리(Nevalı Çori)는 1983년부터 1991년까지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초기 신석기 거주지 유적으로 농업의 흔적과 매장의 흔적도 발견된 곳이다. 약 기원전 8400년에 세워져 8100년에 몰락했다고 추정한다. 두 유적이 위치한 지역은 현대 밀 재배종의 원산지인데, 네발르 초리에서 발견된 밀 농사 흔적은 아마도 인류최초의 밀 재배였던 듯하다. 슈미트는 야생 곡물을 채집하여 식량원으로 삼던 이곳 사람들이 어느 순간부터 집단적으로 곡식을 재배하기 시작했다고 추정했다. 집단사회체계를 농경 정주생활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기존 학설과 정반대로 수렵 채집민들에게서도 집단 체계가 나타날 수 있고, 농업 또한 이들이 조직적으로 할 수 있다는 이야기라, 기존의 상식과는 반대된다. 이 때문에 슈미트 교수는 이 유적이 [[샤머니즘]]적인 [[수메르 신화]]의 조상 격에 해당하는 원시신앙을 믿던 사람들이 만들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즉, 사냥 및 채집을 하는 수렵생활 → 원시적인 농업활동으로 먹을거리를 충분히 확보 → 사람들이 신을 섬기는 유적을 만드는 여력이 되는 것이 인류 역사의 흐름이라고 생각하였는데,[* 먹을 것이 충분히 확보 된 후에나 죽은 뒤의 삶에 대해서 생각할 여유가 생기고, 문화와 함께 종교가 탄생했다고 보았다. 오늘 짐승한테 잡아 먹힐 지 내일 굶어 죽을 지 모르던 수렵채집 시대에는 이정도 수준의 대규모 종교 제단이 탄생할 수 없다고 본 것. 실제로 현대에도 전쟁이 난다든지 기근이 닥치면 예체능을 비롯한 문화예술산업이 발전하지 못하고 정체하게 된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것도 이러한 정설을 바탕으로, 구석기(수렵채집) → 신석기(농경) → 청동기(청동거울 등을 이용한 제사, 샤머니즘의 출현)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당시 농업을 했다는 증거가 아직 발견되지 않았기에 '''먼저 종교가 있었고, 종교적 제단을 만들기 위해 사람이 모일 수밖에 없었으며, 그 인력을 유지할 수단으로 농업이 발달했다는 충격적인 가설'''이 나온 것이다. 사실 그동안에도 기존 이론을 두고 문제를 제기한 이들이 있었다. 단순히 놓고 봤을 때 원시적인 농업[* 원시적인 농업에서는 현대 농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개량된 품종, 화학 비료, 체계적인 생물학·농학 이론, 전문적인 농기구, 가뭄과 홍수 대비 시설, 그 외에 여러 농사 노하우 따위가 당연히 없었다. 따라서 농작물의 수확량이 현대보다 매우 적은것은 둘째치고 농사가 망하는 경우가 너무 많았다. 거기에 우리나라에서도 근현대 시기까지 [[보릿고개]]라는 말이 일상적으로 사용되었을 정도로, 작물은 수확하기에 너무나도 오랜 시간을 요구한다는 문제점도 있다.]은 결코 수렵채취보다 식량을 많이 얻기 힘들었고, 영양학적으로도 수렵채취 쪽이 더 나았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수렵채취를 하는 쪽이 영양학적으로 낫다. 그 쪽이 탄수화물을 훨씬 적게 먹으면서 다양한 음식을 먹을 수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영양학적으로 균형된 섭취를 하게 되고 비타민 부족도 거의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에 원시적인 농업으로만 먹고살려고 할 경우, 적은 품종만을 많이 먹게 되면서 탄수화물만 많이 먹게 되고 비타민 등 무기질 부족 현상을 겪는 경우가 흔하다. 물론 2020년대인 현대에는 생물학과 식품학의 발전으로 비타민 알약 등을 먹거나 영양소의 균형적인 섭취를 행하는 등, 원시적인 농업에서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상태이다.] 하지만 만약 어떠한 이유 때문에 사람들이 다수 모였다면, 일정지역 내에 제한적인 식량만이 생산되는 수렵채취보다 인위적으로 식량 생산을 증가시킬 수 있는 농업이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즉 위의 가설이 맞는다면 인류가 농업을 시작한 이유라는 미스테리가 어느 정도 풀린다. 확실한 내용은 발굴이 더 진척돼야 알 수 있겠지만 '''기존 학설을 뒤엎을 수 있는 괴베클리 테페의 고고학적 중요성이 여기에 있다.'''[* 농경은 모종의 이유(종교)로 무리를 이룬 수렵집단이 좁은 지역에서 집단의 유지를 위해 불가피하게 시작하게 되었다는 새로운 가설.] 즉, 인류가 체질에 맞지도 않는 정착생활을 시작한 것은, 일군 논밭을 지키려는 속지적 사고방식이 아니라, 자기 무리들 간의 정서적 유대를 가능케 해주고, 대자연의 가혹한 생존환경에서 무한한 정신적 안식을 제공해주는 소중한 종교 건축물들을 지키기 위함이라는 해석으로 이어진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 시민들이 자신들의 집과 세간보다 신전을 호화롭게 꾸미는데 더 많은 노동력과 비용을 지불했다는 정서적 메커니즘의 조상격으로 보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